구미의 연혁은 원래 선산의 연혁이다. 1977년 3월 2일(2월 15일 공포) 경상북도 구미지구 출장소를 설치함에 따라 구미읍이 선산군에서 분리되고 칠곡군 인동면(仁同面) 일원이 출장소에 관할되었으니선산의 연혁과 더불어 인동의 연혁이 일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선산은 본래 일선군(一善郡)으로 신라 진평왕 36년(614) 사벌주(沙伐州)를 폐(廢)하여 일선주(一善州)를 설치하고 길찬(一吉) 일부(日夫)를 군주(軍主)로 두었다. 신문왕(神門王) 7년(687) 일선주를 파(罷)하고 다시 사벌주를 설치하였으며 경덕왕(742~764)때 숭선군(崇善郡)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995) 선주(善州)로 개칭(改稱)하고 자사(刺史)를 파견1)하였다가 현종 9년(1018) 상주목(尙州牧)에 예속( 屬)되었으며, 고려 인종 21년(1143) 일선현으로 하였다. 다시 지선주사(知善州事)로 승격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 선산군으로 되고 태종 15년(1415)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되었다.
선산군은 별군호(別郡號)로 화의군(和義郡)이라 칭하였다. 속현(屬縣)이었던 해평현(海平縣)은 신라초기 병정현(竝井縣)이라 칭하다가경덕왕(景德王) 16년(757) 파징현(波澄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 해평군으로 개칭되어 복주(福州: 安東)에, 현종 9년(1018)에는 상주에 속현되었다가 조선 선조 39년(1606) 인동현에 속현되고 선조 41년(1608) 다시 선산부로 환속(還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선주(善州) 때는 군위(軍威), 효령(孝靈), 부계(缶溪) 3현(縣)이 47년간 속현으로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3년째인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금오산성을 수축토록 상계하여 당시 부사 배설(裵楔) 및 사명당에 의해 축조된 후 왜적의 북진 통로를 제압(制壓)하는 영남의 전략요충이 되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에는 관방(關防)의 요새지(要塞地)로 하사도(下四道: 강원, 충청, 전라, 경상)도체부(都體府) 관찰사(觀察使: 右議政李元翼)의 전략본영(戰略本營)으로 왜적의 침입을 방비하는 구국(救國)의 아성(牙城)이 되었다.
영조 11년(1735) 금오진(金烏鎭)은 독진(獨鎭)으로 승격되고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는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겸 금오진별장(金烏鎭別將)이 되어 선산, 개령, 금산, 김천, 지례 등을 관장하고 전략적 요지가 되어 3,500명의 군병이 상주(常駐)하였다. 영남의거진(巨鎭)으로 체제를 갖춘 금오산성은 한말까지 군병이 주둔하여 군사적으로 그 기능이 존속되었다.
영조 때 상구미면(上龜尾面)과 하구미면(下龜尾面)으로 분할, 개칭된다. 봉계리(鳳溪里), 고사암촌(高思巖村), 평성리(坪城里) 등은 평성면(坪城面)으로 망장리(網章里)는 망장면(網章面)으로 각각 편입 되었다. 고종조에 이르러 상구미면은 상고면(上古面), 하구미면은 하고면(下古面)으로 개칭되었으나 연대는 미상이다.
고종 32년(1895)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도호부에서 군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부, 군, 면 폐합으로 9면 113동으로 개편될 때 상고면과 하고면을 병합하여 구미면이 되었다. 동년 7월 15일 금릉군 아포면(牙浦面) 송천동(松川洞: 崇山洞)일부가 구미면에 편입되고 구미면 일부와 부곡동(釜谷洞) 일부가 아포면에 편입되었다.
1962년 1월 1일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73년 7월 1일 칠곡군(漆谷郡) 북삼면(北三面) 낙계동(洛溪洞)이 구미읍에 편입되고 산동면(山東面) 도산동(桃山洞)이 군위군(軍威郡) 소보면(召保面)으로 편입되었다.
1977년 3월 2일 경상북도 구미지역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 2월 15일 법률 제301호(1977. 12. 19 공포)에 의거 구미시로 승격되어선산군에서 분리되고 칠곡군 인동면(仁同面) 일원이 병합(倂合)되었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3014호(1977. 12. 19 공포)에 의거 선산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읍 7면 96개동이 되었다.
1983년 2월 15일 옥성면 봉곡동(鳳谷洞), 포상동(浦上洞), 금릉군(金陵郡) 감문면(甘文面) 봉남동(鳳南洞), 소재동(所才洞)이 선산읍에 편입되고 칠곡군 북삼면(北三面) 오태동(吳太洞)이 구미시에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 선산군 도개면(桃開面) 청산동(靑山洞)이 의성군(義城郡) 구천면(龜川面)으로, 선산군 장천면(長川面) 석우동(石隅洞)이 칠곡군 가산면(架山面)에, 의성군(義城郡) 단밀면(丹密面) 용산동(龍山洞)이 선산군 도개면에 각각 편입되었다.
1988년 5일 1일 지방자치법 시행으로 군조례(郡條例) 제1060호에 의거 동이 리로 개칭되고 동년 7월 1일 해평면에 일선리(一善里)가 신설(新設)되었다.
1989년 1월 1일 칠곡군 가산면(架山面) 신장리(新長里)가 장천면에 편입되므로 선산군은 l읍 7면 98개리가 되었다.
한편 구미시에 병합된 인동은 신라시대에 사동화현(斯同火縣)이라 하였다. 그 후 수동현(壽同縣)으로 개칭되었는데(연대 미상) 경덕왕때 인동으로 고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경산부(京山府: 星州)에 속현 되었다가 공양왕 2년(1390) 경산부에서 분리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 지방제도 개정으로 감무를 혁파(革罷)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가 선조 37년(1604) 4월 찰리사(察理使) 곽재우 (郭再祐)에 의해 천생산성의 외성(外城)이 축조된 후 관방(關防)의 요새(要塞)로 부각됨에 따라 선조 38년(1605) 7월 도원수(都元帥)한준겸(韓浚謙)의 계청(啓請)에 의해 도호부로 승격되고 도호부사(都護府使)는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하게 되었다.
선조 39년(1606) 해평현이 인동부(仁同府)에 내속(來屬)되었다가 선조 41년(1608) 선산부로 환속(還屬)되었으며 인조 22년(1644) 소호리(巢虎里)와 복곡(福谷)이 칠곡군에 편입되었다.
숙종 25년(1699)인동부사 최문징(崔文徵)이『옥산지(玉山志)』를 간행하였다.
고종 32년(1895) 5월 26일 지방제도 개정으로 도호부에서 군이 되었다가 1914년 3월 1일 인동군 관할의 9개면 읍내면(邑內面), 북면(北面), 동면(東面), 장곡면(長谷面), 문량면(文良面), 석적면(石赤面), 북삼면(北三面), 약목면(若木面), 기산면(岐山面)이 칠곡군(漆谷郡)에 병합(倂合)되었다.
인동은 신라 때부터 1914년 칠곡군에 병합될 때까지 l천여년간 관아의 소재지였다. 1914년 이후부터 1977년 구미에 편입 직전까지 63년간 인동면사무소를 인의동(仁義洞)에 두었다. 조선 초기에 인동면은 부내면(府內面)과 북면(北面)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부내면을 읍내면(邑內面)으로 개칭하였다.
1914년 4월 1일 읍내면과 북면을 병합하여 인동면이라 개칭하고 동년 7월 15일 인동면 증동(甑洞:會洞) 일부가 선산군 산동면 성수동(星水洞)에 편입되었다.
1977년 3월 2일 경상북도 구미지역출장소의 행정관할로 되었다가 1978년 2월15일 구미시에 편입되었다. 옥산(玉山)은 별호(別號)이다.
구미시는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94. 8. 3 공포)에 의거 선산군과 통합되어 새로운 구미시가 되었다.
특히 구미시는 내륙 최대의 공업단지가 1970년도부터 조성되어 전자, 섬유 등 289개 업체가 입주 가동 중에 있으며 고아농공단지(高牙農工團地), 해평농공단지(海平農工團地), 산동농공단지(山東農工團地)가 조성되어 도농공(都農工)이 조화로운 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